치료와 수용의 사이에서 균형잡기

김성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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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5 00:02



「부모와 다른 아이들(원제: Far from the tree)」 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앤드류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썼다.


동일한 일단의 문제를 둘러싸고 완전히 상반된 두 개의 허구가 존재 한다. 첫 번째 허구는 자폐증 자녀를 둔 부모들의 기적 같은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에서는, 마치 부모의 과감한 용단 덕분에 꽁꽁 언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제비꽃이 만발한 봄 들녘에서 춤을 추듯이, 고통에서 탈출하여 완전히 말을 할 줄 알게 되고,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신선하고 황홀한 매력을 발산하는 아름다운 소년 소녀들이 묘사된다. 헛된 희망을 주는 이런 이야기에는 자폐증과 싸우고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는 정작 쏙 빠져있다. 


두 번째 허구의 줄거리는 자폐 아동이 전혀 나아지는 기미가 없음에도 그 부모가 아이를 치료하려고 하기보다 축복해 주고 주어진 상황에 전적으로 만족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이야기는 많은 가족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을 호도하고, 자폐증의 근본적인 문제를 애매하게 만들 수 있다. 요컨대 대다수 자폐인들의 삶에 불가사의 한 측면들이 존재한다면, 자폐증 자녀를 둔 대다수 부모들의 삶은 명백히 힘든 삶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 수도 있다. 사회적 편견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이 가중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전적으로 사회적 편견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애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지 않는 자녀를 양육하는 일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 밤새도록 깨어 있어서 지속적인 감독이 필요하고, 괴성을 지르고 짜증을 부리지만 이유를 알아내려 해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또는 선천적으로 화가 많은 아이를 양육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혼란스럽고 견디기 힘들고, 진이 빠지고, 보람이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구체적인 상황에 맞추어서 치료와 수용을 병행함으로써 이같은 문제를 완화할 수는 있다. 치료하고자 하는 충동에만 이끌리거나 수용하고자 하는 충동에만 이끌리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 1권, p.518-519)


이 글은, 흔히 장애를 또 다른 형태의 다양성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할 때 쉽게 표현하는 ‘다름’과 ‘문제행동 교정’이나 ‘언어치료’라는 말처럼 교정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는 영역에 대해 표현가능한 ‘틀림’의 사이에서 항상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자폐성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의 딜레마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지 자폐성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장애를 진단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영유아들과 그들의 젊은 부모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언제든 다양한 일상적 상황에서 장애로 인해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지속적으로 발생할 때마다 부모들은 이 치료나 교정과 장애의 수용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때로는 자신이 나름대로 찾은 그 균형점을 자녀와 만나거나 부딪히게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일에 진을 빼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렇다면 이 치료와 수용 사이에서 어떻게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갈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해 나또한 정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과 타인의 차이에 대응하는 방식에 관한 것인 동시에 무엇이 적절하고 무엇이 부적절한가를 판단하는 규범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획일화된 정답이 있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부모인지, 교사인지, 전문가인지에 따라서도 당연히 그 기준선은 달라지고, 같은 부모라도 아이의 장애가 가벼운 정도인 부모와 장애가 더 심한 경우에 있는 부모들도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어디까지를 개선하고 어디까지를 있는 그대로 둘 것인가를 판단할 때 항상 생각해보아야 하는 중요한 준거는 있을 수 있다.


첫째, 장애가 있는 당사자인 아이의 입장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장애와 관계없이 모든 아이들은 고통을 당하거나 부당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이 최소한의 인권을 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비록 부모라 하더라도 장애로 인해 필요한 치료나 중재를 이유로 아이에게 부당한 스트레스나 고통을 주어서는 안된다. 스트레스를 전혀 주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부당한 스트레스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말을 가르치는 것이 무발화이거나 거의 발화로 대화하기 어려운 상태의 아이에게는 부당한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자기자극을 통한 안정감을 얻기 위한 상동행동이 특별히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형태나 강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데 단지 장애가 없는 아이들은 하지 않는 이상한 행동이라는 이유로 그 행동을 없애기 위해 아이를 강제로 억압하는 것도 부당한 스트레스나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어른들이나 비장애인들이 정해놓은 규칙과 규범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언어와 어떤 행동들을 가로막거나 억압하는 일은 사실 부모와 교사들 모두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이다. 이것은 치료되어야 할 것과 그냥 수용해야 하는 것 사이의 균형점을 잘 찾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둘째, ‘더 나은 기능’ 또는 ‘더 적절한 행동’이라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의사소통 능력의 차이와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이 중국어로 의사소통을 하거나 해야 하는 상황에서 두 사람간의 의사소통 기능의 차이 중 어느 것이 더 큰 차이일까? 그리고 전자는 심각한 문제이거나 개선되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을 하고 후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중학생이 교복도 입지 않고 사복을 입은 채, 교실에서 수업시간 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껌을 씹고 있는 학생이 있다면 그런 행동은 대개의 우리나라의 교실에서는 부적절한 행동으로 규정되고 교사로부터 지적을 당하거나 제지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미국의 중학교에서는 같은 행동이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그 학생이 감각처리장애가 있거나 감각의 과민성으로 인해 선글라스를 끼면 좀더 편하게 수업에 임할 수 있고, 구강자극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껌을 씹는 동안 집중력이 좋아지거나 신경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는 발달장애 학생이라면 그 행동은 일종의 ‘장애인 편의제공’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적절해 보이는 행동이 필요한 편의제공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더 적절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거의 대부분 절대적인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 개방적이고 더 폭넓게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적 규범이나 윤리적 판단 기준을 가진 사회일수록 당연히 이러한 행동의 적절성에 대한 판단 또한 더욱 유연한 것이다.


‘다름’과 ‘틀림’은 항상 어느 시점에서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와 대상에 무관하게 절대적인 기준이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판단이나 당위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물론, 나는 그 기준이 더 개방적이고 더 많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더 많은 약자들이 정상화의 원칙에 따라 일상을 영위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확대, 발전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부모와 다른 아이들』(전 2권, 앤드루 솔로몬 저, 열린책들)


- 김성남(나사렛대학교 재활자립학과 겸임교수 / 소통과 지원 연구소 대표)


*이 글은 [함께웃는재단]의 후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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