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조금 다른 아이야

김석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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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98

2017.09.08 20:05

(이 글은 아들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에게서 왕따와 폭력을 당하던 때, 학교신문에 아들의 마음을 대신해서 제가 썼던 편지입니다.)



난 조금 다른 아이야

 

 

형님, 누나, 동생, 그리고 친구들 모두 안녕!

내 이름은 강영빈이야. 복도나 운동장에서 이미 나를 본 친구들도 있을지 모르겠어. 얼마 전에 난 범어사의 스님들처럼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친구들은 날 보며 “마빡이, 마빡이다!”라고 웃어댔지. 내가 왜 빡빡 깎았는지 궁금하지? 가르쳐줄게.


난 겉으로 보기에는 키도 크고 몸도 건강하지만, 내 머리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이 있대. 그건 ‘말아톤’ 영화의 초원이형이나 수영선수 진호형 같은 발달장애라는 거야.


그래서 나는 너희들처럼 말도 잘 하지 못하고 노래도 잘 부르지 못해. 하지만 말이 안 들리거나 노래를 모르는 건 아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들은 노래의 가사들을 거의 다 기억하고 있어. 엄마가 노래를 부르다 중간에 멈추면, 나는 바로 뒤의 가사 첫글자를 말할 수 있단다. 그러면 엄마는 잊었던 가사를 기억해내고 계속 이어서 불러주시지. 그렇게 한글자씩 띄엄띄엄 부르거나 음음~하고 고음불가의 소리는 낼 수 있는데, 자연스럽게 부르진 못해.


나의 뇌는 마치 바이러스가 침투한 컴퓨터처럼, 기능이 잘 되다가도 어떤 게임만 하려고 하면 갑자기 여러 화면이 한꺼번에 튀어나오고 그러다가 다운되어서 꼼짝없이 멈추어버리는 상태와 비슷하단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백신으로 치료할 수 있다지만, 나의 뇌는 아직 의사선생님들도 원인을 찾지 못해서 약으로도 수술로도 고칠 수가 없대. 다만 나의 행동들을 보고, 뇌 속의 어떤 신경들이 잘 연결되지 못하는지를 추측해서 한꺼번에 여러 정보들을 입력하지 않고, 차례대로 하나씩 입력해 넣어주면 좀 더 쉽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고, 또 나 자신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게 된대.


예를 들면, 노래를 단번에 따라 부르진 못하지만, 한글자씩 천천히 따라서 읽는 것을 자꾸 반복하다보면, 좀 더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나중엔 한 곡을 끝까지 부를 수 있단다. 그래서 난 이제 숫자송을 부를 수 있어. 아직은 소리가 작고 발음이 어눌해서 중얼거림처럼 들리겠지만, 그렇게라도 부를 수 있다는 게 정말 기뻐.


그리고 “엄마”라는 말보다, '1,2,3,4'숫자들과 'A,B,C...가,나,다' 글자들을 먼저 읽을 정도로 기억력은 참 좋았대. 하지만 생활이나 공부에 응용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아서, 엄마는 ‘3’이라는 숫자의 뜻을 가르치려고 과자를 줄 때마다 "세 개는 3", 계단을 오를 때도 "하나 둘 셋, 3" 이라고 말씀하셨어. 너희들의 뇌는 연결이 잘 되어 있어서 하나만 가르쳐도 열을 아는데, 나의 뇌 속 신경들은 하나를 제대로 알려면 열 번 이상의 반복과 경험이 필요하대.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배워서 이제 시계도 읽을 수 있고 구구단도 외울 수 있고, 핸드폰으로 아빠에게 문자메시지도 보낼 수 있게 됐어.


그런데, 요즘 내 생애 가장 어려운 문제를 갖게 됐단다. 나는 이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파서,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는데, 너무 많이 뽑아버리는 바람에 엄마는 내 머리를 다 깎고 모자를 씌워주셨어. 그래서 마빡이 스타일이 된 거야.





△학교신문이 실린 후 학부모와 친구들은 적극적으로 아들을 응원했다. 파란모자 쓴 이가 아들.

 

그 골치 아픈 문제가 도대체 뭐냐고? 그건 말야, ‘너희들과 노는 방법’이야. 운동장 조회 때 줄을 서는 것이나, 음악에 맞춰 율동하는 것들은 흉내내기가 쉬운 편인데, 쉬는 시간에 너희들이 잡기놀이 하며 몸을 부딪히거나 씨름하듯 뒤엉키고 간지럼 태우는 모습들은, 내 눈에도 참 재미있어 보여 따라하고 싶지만 그걸 자연스럽게 하는 게 너무 어려워.


내가 용기를 내어서 너희 중에 한 명을 툭 쳐보았는데, 그 아이는 나를 더 세게 치더구나. 나는 단지 같이 웃으며 장난하고 싶은 거였는데, 내가 무얼 잘못한 걸까? 그래서 고민하다가, 나도 그 아이처럼 세게 다른 아이를 쳐보았어. 너희들과 어울리려면 그렇게 세게 쳐야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느낌이 이상해. 복도에서 만난 똑똑해 보이는 형님들도, 친구들도 나를 더 세게 더 세게 때리기만 하고, 선생님께도 야단 듣고, 집에 가서 엄마에게도 혼만 났어. 아, 난 도대체 너희들과 어떻게 놀아야 하지? 난 말도 잘 못하고, 카드 놀이도 할 줄 모르고, 공 차는 것도 서툴러서 놓치기만 하는데...


어른들 중엔 나 같은 아이를 보고 ‘자폐증’이라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고 혼자 노는 것을 좋아하는 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사람들을 절대로 싫어하지 않아. 머리를 길게 기르고 리본으로 묶은 여자친구를 보면 예쁘고 신기해서 만지고 잡아당겨보고, 남자친구들에겐 ‘까꿍놀이’처럼 같이 놀래키며 웃고 싶어서 툭툭 쳐봤던 거야. 그런데, 너희에겐 그게 귀찮고 아팠니? 그렇다면 정말 미안해. 진심이야.


그런데 너희들과 어울려 노는 방법이 내게는 너무 어려워서, 때로는 포기하고 나만의 세계로 도망가고 싶단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뽑기도 하고, 손으로 눈을 가리고 몸을 움츠리기도 하고, 슬퍼서 울고 싶을 땐 너무 혼란스러워서 웃음을 터뜨려버리기도 해. 너희들처럼 차근차근히 말할 수 없는 나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알려야할지 모르겠어.


엄마는 오늘 아침 등교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어.

“영빈아, 공부는 엄마와 선생님이 가르쳐줄 수 있지만, 친구들과 노는 방법은 오직 친구들에게서만 배울 수 있단다. 니가 놀고 싶어 다가갔을 때 너를 때리거나 놀린 친구와 형님들을 용서하렴. 그 아이들은 단지 너의 마음을 몰라서 그랬던 것 뿐이야. 니가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처럼 말야. 이제 곧 친구들은 너의 착한 마음을 알게 되고, 모두 너를 이해하고 노는 방법을 하나하나 잘 가르쳐주게 될 거다.“


친구들아, 정말 그래 줄 거니?

그러면 말야, 내가 혹시 또 너희를 치면 “안 돼! 아파.”라고 말한 다음, 제발 싸움을 가르쳐주지 말고, 부드럽게 손잡고 노는 방법을 가르쳐주렴. 나도 몇 가지 짝짜꿍 놀이는 할 줄 알거든. 그리고 아직은 공을 잘 받지 못하지만 자꾸 너희에게서 배우다보면 두 명이서 주고받던 걸 세 명 네 명과 같이 할 수 있게 될 거야. 나의 뇌는 너희들과 아주 조금 달라서 금세 배우진 못해도 여러번 반복하면, 어릴 때 “하나 둘 셋은 3”이라는 뜻을 깨달았던 것처럼 여러가지 놀이들을 조금씩 알게 될 거야.


나에게 너희들은 놀이선생님, 언어선생님처럼 배울 게 참 많은 멋진 친구들이란다.

 

- 김석주 (음악치료사/ 칼럼니스트/ 자폐성인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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