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의 날적이
전공과 입학, 2년은 짧지만 그래도 감사하다
글 : 김언정(21세 발달장애청년 민준엄마)
장애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갈 수 있는 과정으로 전공과가 있다. 교육청에서 교육비를 지원하는 2년 과정으로 전문대학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전공과는 직업재활학과와 자립생활학과로 나뉘는데 직업재활학과는 주로 취업과 관련된 내용을 많이 배우고, 자립생활학과는 취업 내용도 배우지만 자립에 필요한 내용을 더 많이 배운다. 보통 특수학급이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나 특수학교 등에 전공과 과정이 마련되어 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수보다 정원이 훨씬 작아서 매년 시험을 거쳐 선발한다.
2020년, 민준이는 특수학교의 고등 3학년이었다. 예년과 같았다면 학교에서 졸업반이니 면접 연습도 많이 하고, 여기저기 기관 견학 및 방문, 짧게 맛볼 수 있는 취업프로그램 경험의 기회도 있었겠지만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특수학교도 문을 닫았었다. 다른 고 3 아이들은 5월부터 매일 학교에 갔지만 특수학교 고3 학생들은 다른 학년 아이들과 똑같은 적용을 받았다. 코로나 단계에 따라 주 1회 간 적도 있었고, 많아야 주 2회 등교했다. 민준이 친구 엄마들끼리는 우리 아이들도 수능은 안 보지만 전공과 시험도 보고, 취업 준비도 해야 하는 수험생인데 고등 3학년 1년 동안 학교생활도 제대로 못 하고 참 억울하다고 함께 성토를 하곤 했다.
나는 민준이가 중 3이 되던 해부터 각종 취업 및 입학 설명회와 박람회 등을 빼놓지 않고 쫓아다녔다. 처음에는 이런 설명회와 박람회를 통해 취업을 하려면 일찍부터 무엇을 가르치고 엄마인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내고 싶었지만 몇 년을 쫓아다닌 결과 장애 아이의 기능이나 사회성, 타고난 능력 등을 몇 년의 노력으로 취업 현장에 맞는 수준으로 바꾸기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8시간 일자리의 제대로 된 회사의 취업현장에서 요구하는 수준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사회성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어야 했고, 문제가 되는 행동들이 완벽할 정도로 없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스스로 판단력이 있어야 했다.
설명회와 박람회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있다면 고등 졸업 후 진로를 몇 가지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었고, 내 아이의 기능이나 문제행동 여부 등에 따라 어느 카테고리가 맞을지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카테고리는 8시간 정식 취업, 두 번째는 4시간 보호작업장 취업, 세 번째는 전공과와 복지관 취업훈련 프로그램, 네 번째는 복지관 여가생활 프로그램이나 주간 활동 프로그램, 다섯 번째 주간보호시설 이용 등이었다. 어쨌든 민준이는 졸업 후 당장 8시간이나 4시간짜리 취업을 하기에는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고, 고등학교를 졸업 후에 전공과나 복지관 취업 훈련 프로그램에 다니게 되면 가장 좋은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2020년 10월, 전공과 학생들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전공과는 다니던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를 지원할 수도 있어서 잠시 고민을 하였지만 우리 집에서 가깝고, 아이에게 익숙한 곳이기에 민준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전공과에 원서를 냈다.
전공과 시험을 앞두고 학교에서는 이런저런 기능시험 과제들과 면접 예상 질문들을 뽑아서 아이들에게 모의시험을 보곤 하였다. 전형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담임선생님과 통화하면서 모의시험 때 민준이의 반응이 어떤지를 여쭤보았는데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어머니, 민준이는 같은 질문을 매번 하는데도 외워서 하는 대답이 아니고, 조금씩 달라요. 그리고 리스트에 없는 질문을 해도 당황은 하지만 모르면 모른다고 대답을 하고, 맞든 틀리든 자기 나름의 대답을 하기 때문에 대화가 계속 이어지더라고요."
"모른다는 대답은 어차피 정답이 아니니까 점수를 못 받는 거 아니에요?" 하고 다시 여쭤보니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가장 나쁜 것은 '무응답'이에요"라고 말씀해주셨다.
민준이가 7살 때 발달심리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으면서 치료의 일환으로 연극놀이를 한 적이 있었다. 장애가 있는 다른 아이들 2명과 함께 진행했었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뭐든 대답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가령 별주부전으로 연극놀이를 하고 나서 "토끼가 왜 바다로 갔어?" 하고 물었는데 함께 했던 아이가 "응... 응... 나는 집이 좋아"라고 대답했었다. 아이의 엄마는 이 대답에 영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이런 아무 말이라도 대답을 계속하다 보면 늘게 된다고 하셨었다.
그 아이는 이후 점점 대답이 논리적으로 변해갔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보통 아이들보다 많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해가 갈수록 좋아지더니 초등 고학년쯤에는 정말 멀쩡해져서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었다. 그때 당시 민준이는 어땠을까? 선생님의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었다. '몰라요,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이라도 하게 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조언이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무응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방법을 알 수 없어서 나는 참 답답하고 속상했었다.
그러다 '몰라요'라는 대답을 언제부턴가 집에서 하기 시작했었다(시기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초등 고학년쯤부터였나 싶다). 그래도 외부에서는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있는지는 제대로 알 길이 없었는데 담임선생님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니 감사했다. 이 녀석이 이제는 뭐든 대답을 한다니, 그래서 어찌 되었든 대화가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니... 7살 때 기대했던 그것을 20살에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기뻤다.
시험 당일날. 어쨌든 이것도 입시라고 내가 마음이 다 떨렸다. 아이들은 본관 로비 들어가기 전에 시험 순서를 정하는 공을 뽑게 되어 있었다. 노란 공 중 하나를 고르고 속에 든 번호를 확인하는데 이런^^;;; 20번이다. 자립생활학과에 지원한 아이들이 총 20명이라고 했으니 마지막 번호다. 담임 선생님께서 5~6번쯤이면 좋겠다 하셨고, 너무 뒷번호만 안 뽑으면 된다 하셨는데 하필 마지막 번호를 뽑았다. 긴 시간을 기다리며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야 할 시점에는 긴장감도 다 풀어지고, 산만한 상태로 시험을 보게 되지 않을까 싶어 걱정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코로나로 외부인들은 학교에 출입을 못하게 된 상황이지만 원래도 전공과 시험에는 어머니들은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한다. 학교 현관문 앞에만 데려다주고 전형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도 내 순서가 끝났다고 집에 가는 게 아니라 마지막 번호의 친구가 끝날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하는데(이것은 학교마다 다르긴 하다) 대기실 상황도 녹화가 되고 혹시라도 문제가 될만한 것이 없는지를 검토한다 하니 이래저래 걱정이었다.
1시 전에 들어간 아이들이 4시가 다 되어서야 나왔다. 많이 힘들었을 것도 같은데 민준이 표정은 밝았다.
"민준아, 시험 잘 봤어?"
"네!!!"
"무슨 시험 봤어?"
"빨간색, 분홍색 맞추고.... "
"그래? 그리고 또 뭐 했어?"
"몰라요"
민준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모르긴 몰라도 같은 색깔 맞추는 문제 같은 게 나왔다고 대충 짐작은 하지만 정확하지 않고 그 외 다른 문제는 뭐가 나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자립생활학과에 지원한 친구들 중 전달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도 한두 명은 있지만 이미 시험 다 끝났는데 문제 알면 뭐하겠냐 싶어 굳이 전화해서 물어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래서 전공과 시험은 족보도 없고, 보안이 철저하게 지켜진다^^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 아침, 떨어져도 어쩔 수 없다고 자꾸만 내 마음을 내려놓는 작업을 했다. 발표시간은 오후 1시, 시간에 맞춰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을 해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정각 1시에 문자가 딱 날아왔다.
강민준 님은 전공과 자립생활학과 전형에 합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할렐루야~!!!! 거의 동시에 전화벨도 울렸다. 누구누구 합격했더라, 누구는 안됐더라... 같은 학교 친구 엄마가 다른 친구들 소식도 전해준다. 그런데 가만 보니 나와 친하게 지내는 엄마들의 아이들은 다 불합격하고 민준이만 합격한 상황이었다. 발표 당일 난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주변 사람들을 위로해주느라 바빴다. 사실 전공과에 간다고 해서 보장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학교생활이 2년 더 연장된다는 거, 졸업 후 갈 곳을 서둘러 알아보지 않아도 된다는 거뿐이었다. 2년 뒤에는 전공과에 불합격한 사람들과 똑같은 고민을 하고, 아마도 똑같은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며 사람들을 위로하다 보니 그날 나는 마음이 들뜨기보다는 가라앉았다.
그런데 저녁시간 교회 목사님 부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민준이 합격 소식을 듣고 울 남편의 승진 때보다 더 기뻤다고 하시는 목사님과 순식간에 잔치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시는 사모님의 하이톤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밝아졌다. 그래, 2년 뒤는 그때 가서 고민하자. 전공과에 떨어져도 이상할 것 없고, 항의할 근거도 하나도 없는 상황인데 떡 하니 붙었으니 정말 기쁜 일이 아닌가.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도 내 몫이긴 하지만 마음껏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도 내 몫임을 깨달았다. 그날 밤, 남편과 와인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기뻐했다.
전공과에 입학하고 6개월이 지났다. 2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아서 벌써부터 내년에 졸업하면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감사를 기억하려고 애쓴다. 신학기가 될 때마다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친구들 사이에서 이 녀석이 적응을 잘할까 고민했던 시절을 다 까먹게 할 만큼 전공과 입학 후 6개월은 정말 조용히 훅 지나갔다. 소소한 몇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새롭거나 충격적인 일들은 아니었고, 학교와 가정에서 동시에 지도하니 문제가 되었던 행동들도 금방 사라졌다.
작년 요맘때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많이 불안하고 마음이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부터 또 똑같은 상황을 겪겠지만 그래도 힘을 내본다. 장애아이들이 갈 곳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내가 보내고 싶은 기관에, 내가 보내려고 하는 시기에 내 아이가 들어갈 자리가 남아있으리라는 보장은 여전히 없다. 그러나 내 몫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찾고, 구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돌아보면 주님께서는 막막한 상황들 가운데 항상 좋은 길로 인도해주셨다. 이것을 기억하며 오늘도 나는 내 몫을 다할 것을 마음먹는다.